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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영(慶尙監營)은 상주시에서 어디로 옮겨 갔을까요?

뷰티플임 2024. 3. 1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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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영(慶尙監營)은 조선의 지방 행정의 8도제하에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이다. 현대의 도청과 같은 역할을 했다. 소문난 유적과 고택이 많은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고향 상주는 내세울만한 것이 없어서 늘 부끄러웠다. 그리고 고향이 상주라고 하면 대부분 남해 상주해수욕장의 그 고장을 말한다. 그나마 상주곶감과 계룡산 남매탑 전설을 이야기하면 "아! 그 상주입니까!!" 라고 알아 듣기도 한다. 학식과 수준이 높은 사람들만 내 고향 상주를 이해한다.

 

경상감영 상산관은 나주읍성 금성관과 마찬가지로 출장을 온 관료가 머무는 객사이다. 상주임란북천전적지에 이건 복원하였다.



경상감영은 조선 초기에는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에 있던 것이 팔거현, 달성군, 안동부 등지를 옮겨다니다 선조 34년(1601년), 최종적으로 대구로 이전되어 그곳에 정착하였다. 1910년 경상북도 청사로 개칭하였다. 1966년 경북도청을 포정동에서 산격동으로, 2016년에는 안동시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2017년 4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38호 대구 경상감영지로 지정되었다.

경북 상주시 왕산을 중심으로 조선 초기까지 자리를 한 경상감영은 지금은 빈 터만 남았고 일대를 왕산역사공원으로 조성하였다.



태종 7년(1407년)에 경상도가 다른 도에 비해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는 이유로, 조선 조정은 낙동강을 경계로 서쪽을 우도(右道), 동쪽을 좌도(左道)로 나누어 좌도는 전대로 경주부윤이 맡고 우도는 상주목사가 맡아 해당 도의 관찰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경상도의 우 · 좌 분도(分道)가 당시 조세 체계의 혼란 등의 부작용을 일으키자 이듬해 원래대로 행정 구역은 환원하고, 대신 경주에 있던 감영을 상주로 옮겨 상주목사가 경상감사를 겸하게 했다.

경북 상주시 왕산역사공원

 


 

대구 경상감영공원


경상도의 분도가 되풀이됨에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던 경상감영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년), 처음으로 대구부에 세워졌다. 좌·우로 나뉜 경상도를 다시 합치는 과정에서 경상도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당시 경상도를 점령하다시피 한 왜군이 전라도로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대구가 주목받은 것이었다. 

왜란이 끝난 선조 34년(1601년), 안동대도호부가 교통이 불편한 내륙에 있어 위치상 감영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다시 대구로 옮기자는 이덕형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감영은 대구부로 옮겨지고 대구부사가 경상감사를 겸하게 되었다. 이때 대구에 새롭게 지어진 경상감영의 부지가 바로 대구 중구 포정동에 소재한 현재 경상감영공원으로 조성된 선화당(宣化堂) 일대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상주 경상감영의 태평루는 현재 상주임란북천전적지에 이건 복원하였다.

 

상주시는 한양으로 가는 경상대로(상주~문경새재~하늘재)가 개설된 교통의 중심지이가 과거길이었다. 해서 임진왜란 때는 코니시가 이끈 왜군에 의해 전란을 입었고, 6.25 전쟁 때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북한군에 의해 다시 전화를 입었다.

상주읍성 등 화려했던 삼국시대에서 조선까지 이어진 문화유적은 모두 사라졌다. 상주시에는 북성로, 서성로, 교동로 등 성이 있었다는 지명만 전할 뿐이다. 그 많았다던 명문 세족의 고택도 남아 있는 것이 드문 편이다.

상주 왕산 최고봉 장원봉은 해발 72m이다

 

역사에 관심이 없던 국민학교 시절 왕산 주변의 만화방에서 50원을 내고 하루 종일 만화책과 씨름을 하다가 왕산에 올라가기도 했다. 지금처럼 탁 트이지 않았고 가옥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산은 어린 아이 눈에는 상당히 높게 느껴졌지만 그후 20대, 30대 나이를 먹고 다시 갔을 때는 껌딱지 동네 동산 수준이었다. 그 만큼 내가 자란 것이고, 꽉 막혔던 건물을 시에서 매입하고 지금은 왕산역사공원으로 조성하였고 계속 진행 중이다.

1000원 지폐를 놓고 발복을 빌었다

 

 

오르내리는 길에는 미륵불도 있고 장지연 선생의 '시일야방석대곡' 사설 문장을 새긴 탑도 있다. 황성신문에 실린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은 경북 상주 태생 장지연 선생의 글이다.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은 경북 상주 태생 장지연 선생의 글이다.

 

백우정 정자는 상주시 은척면 하흘리에서 옮겨온 건물이다

백우정 정자는 나에게 특별한 추억이 깃든 곳이다. 89년도 겨울에 애들 엄마가 곱게 한복을 입고 처음으로 우리집 어른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가 여기서 사진을 함께 찍었다. 백년해로의 언약을 한 곳으로 우리 부부의 상징적 장소이다.

백우정

작고 낮은 상주 왕산에도 산수유꽃이 피고 봄이 왔다. 비록 화려했던 조선 초기의 경상감영의 건축물은 없어졌지만 경상도를 호령하던 관찰사가 머물렀던 위엄은 그대로인 듯했다.

왕산 둘레 양지바른 곳에는 인근 노인들께서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운동기구를 타는 사람, 걷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공원 표지석 옆에는 ,<속리산 정이품송 아들 나무>가 자라고 있고, 세월이 흐리지 않은 듯한 모습의 <대구소리사> 간판도 빼꼼히 보였다. 공원 전체에 잔잔한 음악도 스피크를 통해 울려나오고 있다.

상주 왕산역사공원의 정이품속 아들 나무
상주시 왕산 역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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